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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 내리는 청사포, 아내가 뿔났다

Life Essay/Life Story

by 김현욱 a.k.a. 마루 2009. 1. 22.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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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랫만에 아내와 단 둘이 길을 나선 셈이다.
그것도 시내가 아닌 겨울바다가 설렘을 부르는 해운대로 향하는 것은 부산에 살고 있지만 그다지 잦은 일은 아닌 까닭이다.

겨울비 내리는 해운대

오랜 겨울 가뭄을 달래듯 겨울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시고 있었고, 평일 한낮의 해운대는 한산하고 깨끗함이 느껴졌다.

몇일 전 선물받은 청바지 치수가 커 로데오아울렛이 있는 해운대로 가는 길에 말 벗삼아 동행했지만 아내는 소녀처럼 오랫만의 함께하는 남편과의 오붓한 드라이브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길을 나설 때 보다 굵어진 차창 밖 빗줄기를 본 아내가 뿔났다.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야?, 오후에는 비가 그친다고 하더니.."

그동안 아이들 키우느라 마음 편히 오붓하게 남편과 데이트를 가지지 못했던 아내는 오랫만에 함께하는 소중한 기회를 겨울비 때문에 망친 것 같아 연신 아쉬움을 토했다.

참으로 무심한 사람, 그 주인공은 다름아닌 바로 나였다.
사는게 뭔지? 늘 바깥일에만 열정을 쏟을 줄 알았지 정작 내 곁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진 못했던 것이다.

결혼 14년, 부산에 적지않은 세월을 살아건만 아내는 청사포가 어딘지 모른다. 하기야 나도 발길을 옮긴 건 비지니스 때문에 두 서너번이 전부인 곳이다. 아내가 그 곳에 가고 싶다고 조른다. 멀지 않은 그 곳으로 겨울비 내리는 청사포의 풍경을 아내에게 선물하고 싶어 핸들을 꺽었다.

청사포와 달맞이 길

아름다운 일출, 동해 남부선 기찻길 건널목, 영화 '파랑주의보'의 촬영지인 청사포는 조용한 겨울바다의 운치를 감상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달맞이 고개길을 따라가다 청사포로 내려가는 길에서 바라 보는 풍경은 또 하나의 매력이 있다.

청사포 풍경

겨울바다는 인적이 드물고 조용했다. 방파제 끝자락에 선 연인들의 모습에서 젊은 날 자화상을 보는 듯 했다. 애써 팔장을 꼭 껴고 방파제 끝 등대로 우산쓰고 걷고 싶은 아내의 마음을 시기하듯 거센 해풍 속 차디찬 겨울 비바람은 중간에 아내의 발걸음을 돌리게 만들었다.

청사포 등대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잊지 않을께......
꽃 피는 봄날이 오면 당신 손 꼭잡고 이곳에 와 아름다운 일출과 지난 온 세월의 그리움을 다시금 꽃피워주리라는 무뚝뚝한 남편의 작은 약속을...

이렇게 겨울비 내리는 청사포의 추억은 아내를 뿔나게 했지만 남편은 철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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